[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본 위대한 3B 음악가들(바흐, 베토벤, 브람스)

Posted at 2017.06.04 19:03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음악사를 통 털어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세 사람의 독일 출신 작곡가라면 아무래도 바흐, 베토벤, 브람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사람 이름의 성이 모두 알파벳 B로 시작하는 까닭에 '3B'라 부르기도 합니다. 최초의 전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가 처음 이 말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독일 출신의 작곡가라는 것 말고도 참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업적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늠하는 잣대로 삼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나무위키

 

먼저 그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다 일찍 독립해서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갔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 음악가, 예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어떤 난관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집념, 근면과 성실로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enie.co.kr/magazine/subMain?ctid=8&mgz_seq=3522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바흐는 어려서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큰 형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조카들이 늘어나자 따로 나가 살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생계형 음악가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일찍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해서 열 세 자녀를 낳았고 부인을 사별한 후 재혼한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습니다. 무려 스물이나 되는 자녀들을 누구보다 잘 양육하고 교육하였기에 장남 빌헬름 프레데만과 차남 카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막내인 요한 크리스찬이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음악사에 길이 그 이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학도시 라이프치히에 정착하게 된 것도 성장한 자녀들의 교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습니다.

 

이미지출처 : http://www.christianitytoday.com/history/people/musiciansartistsandwriters/johann-sebastian-bach.html

 

베토벤 역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처음 음악가의 길을 개척하여 크게 성공하였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무능하고 심약했던 탓에 알콜 중독자로 살면서 가족들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괴롭히며 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베토벤은 형제들을 감싸고 돌봤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그 자신은 물론 두 동생까지 돌봐야했고 죽는 날까지 그 책임을 다하느라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말년에는 심신이 다 고갈되어 도저히 하루도 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형제들을 통 털어 유일한 혈육으로 남은 철부지 조카 카를의 앞날을 걱정하고 준비하느라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 바쳤습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나치리만큼 절약했지만 그렇게 모은 돈은 고스란히 철부지 조카에게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lifesitenews.com/opinion/the-problem-with-the-beethoven-argument

 

브람스의 아버지 또한 음악가였습니다.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했으며 어린 브람스에게 음악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 대신 14살부터 함부르크 항만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으며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의 반주자로 발탁되었고 이후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반주자로 음악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사귄 요아힘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고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요아힘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와 동생들이 늘었지만 가족을 돌보는 브람스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계모와 이복동생들까지 보살폈습니다. 무작정 믿고 전 재산을 맡긴 출판업자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도 원망하는 법이 없었고 스스로는 검소하게 살면서 그렇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여유까지도 늘 누군가에게 베풀었습니다. 슈만이 그에게 빛을 주었듯이 그 또한 드보르작을 비롯한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존경했던 스승의 부인이자 마음속으로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던 클라라와 그 가족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thefamouspeople.com/profiles/johannes-brahms-395.php

 

후대에 귀감이 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 세 작곡가 역시 모두 고귀하고 숭고한 가치와 신념을 가졌고 음악으로 그것을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에서 진정 놀라운 것은 그들의 두 눈은 언제까지나 저 높은 곳의 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뻗어 끝내 닿으려 했으면서도 두 발은 늘 꿋꿋하게 땅을 딛고 서서 그들을 향해 몰아치는 세찬 바람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맞으며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라면 곧 몽상가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는 것이 예술이며 이상으로 현실을 이끄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 믿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라고 생각하여 현실을 파고들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깨닫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살다 보면 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겪습니다. 현실은 이상을 용납하지 않고 이상은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세 작곡가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 세상을 다 아우르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현실에서 이상을 찾았고 이상으로 현실을 구했습니다. 이상이 있었기에 현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이 거칠수록 이상은 더 높아만 갔습니다. 남다른 재능이 축복이자 저주인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 또한 장벽이면서 또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느라 단련된 힘으로 누구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흐와 베토벤, 브람스는 남다른 재능을 책임이라 생각하여 세상을 향한 축복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닥친 현실 또한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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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공연장의 CEO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 벤슨 푸아[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공연장의 CEO는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 벤슨 푸아

Posted at 2015.11.17 15:14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싱가포르에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과 같은 복합문화공간인 에스플러러네이드(Esplanade)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봐야지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함께 경험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방학을 이용하는 계절학기 과목으로 “세계 문화현장 탐방”을 열고 에스플로네이드의 CEO 벤슨 푸아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메일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며, 몸담고 있는 학교는 어떻고, 이러저러한 이유와 의도로 학생들을 인솔해서 그쪽을 방문하고 싶은데 제공할 수 있는 정보나 편의가 없는지, 혹시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 등등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메일을 보내고 점심을 먹고 연구실로 돌아왔더니 벌써 답장이 와 있었습니다. 알게 되어 반갑고 참 좋은 취지의 계획이라 그 자신도 기꺼이 돕겠다며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세부사항의 제안과 결정은 비서를 통해 진행할 테니 조교나 학생 대표가 서로 연락을 주고받도록 하자는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일단은 서로 모르는 사이의 외국인에게 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빠른 회신을 받은 일이 없어 놀랐고 그쪽 입장에서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일 뿐 그다지 이익이나 덕을 볼 일이 아님에도 성의 있고 뜻밖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출처 : 서울시청

 

 

그런데 그것은 겨우 시작이었을 뿐 이후의 감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서로 메일을 주고받은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다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아마도 이런 저런 사정을 핑계로 협조가 불가하다는 내용이겠거니’ 생각하며 메일을 열었더니 그게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생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나이 많은 비서보다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신입사원이 더 적격이라는 생각에 그런 직원 한 사람을 지정해 이후 연락과 진행을 그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세안 문화예술포럼에서 싱가포르의의 벤슨 푸아(Benson Puah)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대표의 연설

(출처 : 해외문화 홍보원)

 

 

일면식도 없는 외국 사람이 뻔뻔하게 메일로 부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인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배려하는 마음씀씀이를 대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고 불과 몇 분 전의 삐딱했던 짐작이 너무나도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정했고 마침내 우리 일행은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일찍 서두른 탓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흩어져 사방을 둘러보다 약속시간이 가까울 무렵 로비에서 모이라는 지시를 하고 혼자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일행 중 한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로비에서 우연히 벤슨 푸아와 마주쳤는데 일찍 도착했다는 말을 듣더니 일정을 앞당기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학생들을 불러 모아 예정된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직원들이 배석한 가운데 벤슨 푸아와 그를 보좌하는 간부들이 직접 진행하는 PPT 발표와 질의응답 시간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걸 보는 순간 또 한 번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정된 서로의 상견례와 공연장 소개라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놀랄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에스플로네이드 곳곳을 둘러보는 투어까지 벤슨 푸아가 직접 나섰는가 하면 예정에 없던 저녁 초대와 공연관람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깔끔한 음식이 준비된 저녁식사 시간 동안 벤슨 푸아는 학생들이 앉아 있는 모든 식탁을 빠짐없이 돌며 격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업무가 바빠서 PPT를 발표하는 자리에 배석하지 못했던 직원들은 퇴근하면서 그 자리에 잠시 들러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정말이지 그 대표에 그 직원들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고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놀랍고 감동적인 경험이 더하게 되자 이날의 마지막 순서인 공연관람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잔뜩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스스로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를 좋아한다고 했고 투어를 하면서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중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아마도 그 공연에 초대하려니 예상했는데 정작 벤슨 푸아가 초대한 공연은 야외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민속음악 공연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누구나가 구경할 수 있는 무료공연이었기에 실망이 더 컸는데 야외공연에 초대한 까닭을 듣고 나니 또 한 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들 대부분은 아직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에 큰 관심이 없기에 당장은 그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연을 부담 없이 쉽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것이 바로 에스플로네이드의 현재이고 당면 과제이기에 그 현장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꾸 이 공간을 찾다 보면 언젠가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종류의 공연들에도 점차 호기심을 두게 될 것이고 그때는 또 그것을 관심과 호감으로 바꾸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안동 탈춤 페스티벌

 

 

이 말을 듣고 보니 이곳의 이름을 에스플로네이드라고 지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이라는 말 뜻을 우리식으로 푼다면 ’마실‘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저녁 먹고 하릴없이 거닐다가 문득 찾아가는 이웃집처럼 늘 궁금하고 정겨운 곳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 당시 ’싱가포르 아트센터‘였다가 개관 무렵 널리 공모하여 채택된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싱가포르에 복합 문화센터가 생긴 것은 일본보다 늦고 그에 앞선 우리보다는 한참이나 늦었지만 정작 그 고민과 모색을 시작한 것은 아시아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였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술의 전당처럼 있으면 남들 보기에도 그럴듯할 테니 일단 만들어 놓고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요모조모 따지고 심사숙고한 끝에 만들기로 했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하고 마련했던 것입니다.

 

 

 

두리안을 형상화했다는 에스플러네이드, 싱가포르의 핫 스팟! 

 

 

전에 없던 것이 처음 생겼으니 그 책임자를 물색하는 일도 쉽지 않았겠지요. 경험이 있는 경력자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다른 생각과 선택을 했습니다. 상식과 원칙을 앞세운 것이지요. 공연장과 전시장은 물론이고 여기에 식음료장까지 더한 복합문화센터라는 것이 결국은 이용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니 이와 유사한 서비업에 오래 종사하여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전문가들 가운데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관심과 소양, 애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적임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바로 벤슨 푸아였고 이전에 그는 싱가포르 최고의 호텔 경영자였습니다. 다양한 예술 장르와 문화 전반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PPT로 준비한 발표를 듣는 동안 어쩐지,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그랬구나 했는데 질문응답시간에 한 학생이 민망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호텔 경영자였던 당시와 지금의 연봉을 비교해달라는 것이었고 전에 비하면 지금의 연봉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다시 질문하기를 그런데 왜 지금의 자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었고 그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그는 호텔 경영자로 있으면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 긍지와 자부심이 컸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서비스를 늘 특정의 소수에게만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고 그래서 불특정 다수, 즉 원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들 모두에게 서비스의 감동을 전할 수 있는 에스플로네이드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 서곡

 

 

지금도 누군가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주저 없이 벤슨 푸아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공연장이나 전시장, 혹은 복합문화센터의 경영자로 어떤 사람이 적합한지 의견을 물어올 때면 호텔과 같은 서비업에 오래 종사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고 최고의 위치에 오른 전문가들 가운데 문화 예술 전반에 관한 관심과 소양, 애정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적임자라고 말해줍니다. 에스플로네이드를 방문했던 날 공연중이었지만 결국은 보지 못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가운데 피가로가 부르는 아리아 ‘이제는 못날으리’ 들으며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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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전, 인간을 말하다]자유를 꿈꾸는 고독한 속물, 베토벤-2부-[서양고전, 인간을 말하다]자유를 꿈꾸는 고독한 속물, 베토벤-2부-

Posted at 2013.05.18 00:00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자유를 꿈꾸는 고독한 속물 베토벤의 두번째 주제는 

 

자유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다.-


왠지 베토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주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천재와 자유, 왠지 자유란 천재들에게 허락된 영역처럼


여겨저서 그런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거 아십니까? 베토벤의 곡은...

 모든 곡이 환희 승리


그의 인생은 몇가지로 요약을 해볼수 있습니다.

혈육에 대한 끔찍한 책임감

동생에 대한 끔찍한 사랑

동생의 죽음과 동생의 유언으로 동생가족에 대한 부탁을 받은 베토벤


그의 책임감과 의지를 엿볼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자유분방하고 조금은 심하게 사교성(?)이 좋은 재수씨로부터

5년의 송사를 통해 조카를 빼앗아옴니다.

조카를 재수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를 시킴니다.

외로운 조카는 자살을 시도하며 불안한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천재 베토벤에게도 이러한 가정사가 있었다는거


베토벤..왠지 평생 음악만 하다 한 평생을 마감한거 같지만...


아니죠? 왠지 이러한 면으로 조금은 친근감이 생기지 않나요?

베토벤의 32곡 피아노소나타는  신약선서와 같다고 합니다.

피아노 입학시험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곡은 반드시 들어가며

음악의 구성을 배움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그럼 '구약성서'는 무엇일까요? 

'바하의 피아노소나타' 


참고로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32곡의 마지막 바로 ‘운명’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건강은 잃어가고

조카는 망나니...그 속에서 만들어낸...음악

피아니스트 김성훈씨 성신여대 교수

32번 1악장을 연주함

중간중간 청중들을 위한 위트있는 유머와

연주자와의 추억을 통해 청중들에게 연주자의

인간미를 느끼며 연주에 더욱 집중하게 해주었던 강연능력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쉽게 할 일도 항상 어렵게...

연주자들의 고집에 영광이고 기쁨....


쉴러의 환희의 송가 - 자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프로이텐 오 프로이텐


프라이하이트 오~자유여


그 시절 이런한 단어를 사용했을때


잡히거나 출판금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때 베트벤 9인 심포니 연주시


프라이하이트로 바꾸어 부를 정도로 의미가 많은 곡이라고 합니다.




베토벤 그는,


이것을 30세부터...이것을 꿈꾸게 됩니다.


왜??천재가??


점심시절 본 대학의 청강생으로 계몽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너무 원하는 일은 당장할 수 없습니다.


평생을 기다리고 참다 마지막 순간에나 가능하게 되는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


나폴레옹에게 자신의 이상실현에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3번 영웅을 최대의 작품으로 꼽았을 정도입니다.





나폴레옹을 말미암에 세상의 평등과 자유가 실현되기를 바랬던 것이죠.


나는 죽지만 이후의 삶은 그것이 실현이 될 것이다.


아픈 와중에도 그것을 완성하게 되는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초연은 베를린에서 열리게 되는데요.


당시에는 로시네 오페라가 유명하였는데요. 그 공연인 빈에서 열려


 공연포기하고 베를린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일설에 따르면


들리지도 않는데도 지휘를 했다고 하죠?..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지휘자가 따로 있었고. 초연시 공연장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정도로 열정적이고 의지, 희망, 기대, 이상.


그것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교수님의 곡 설명이 있겠습니다.


1악장 시작은 천천히


2악장 느림에 있어서 바꾸어 빠르게


3악장에 느림.


3장까지는 프롤로그라고 보셔도 됩니다.


4악장에 하이라이트.


가사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혹했던 현실에 갈라놓았던 자들이여

신비로운 그대 자유

그 모든인간이...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자유

자유는 꼭 반드시 꼭꼭 씹어서 소화시켜라

꿀꺽 삼키지 말아라

자유에 대한 목마름


영화의 한 장면...합창~~


너무나도 유명하죠.^^


여기서 잠시 자유에 대한 보충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카찬차키스'묘비에 적힌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

.

.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두려운것이다.


바라는 것이 없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이 고독...


자유로우나 고독한 속물...


끊임없이 이 땅에 없는 것을 갈구하고 쫒아갔던


토벤 음악...


예술이 사회에 줄수 있는 선물


교수님의 자유에 대한 보충설명도 이어집니다.


비틀즈...준레논...폴 메카트니

존레논...바보...바보라 좋다...철없음...

죽을때까지...자유...

음악~~ 이것이 자유다.


그리고 순수한 자유를 꿈꾸던 추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강남역 2번출구...연주...구설수에 오른... 


70억짜리 악기에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악기상에게 빌린 악기로 연주를 하였고


만육천구백원을 벌었으며...


빵사먹고 헤어지려 했던 계획은 취소하고 간직하기로 했다던...

  

돈봉투의 돈 간직하면서...


서로 그 돈의 안부를 물어보며...


좋은 추억...철없는 연주자...를 회상한다고 하셨습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10곡...


베토벤이 마지막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작곡가...

그가 베토벤입니다.


그 이후 피아노가 대세가 되면서...피아노 곡만 작곡이 되게 됩니다.


피아노9번 크로이쳐 소나타...


당시 연주불능...왜??


너무 어려우니까!!


톨스토이 자기가 아는 가장 야한곡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른악기간의 격렬한 싸움이 , 


격렬한 사랑행위처럼 느껴졌다고 하네요.


그렇게 느껴지시나요?^^


운명,자유


자유로운 사람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로운 것이다...


자유로움은 고독을 수반한다는 이야기죠...


고독한 속물, 베토벤이 이번 글로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궁굼하네요.


자유를 위해 속물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외로웠던...


베토벤...to be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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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매혹적인 춤 열정의 탱고! 탱고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매혹적인 춤 열정의 탱고! 탱고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

Posted at 2012.10.15 07:3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36)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내 음악이 탱고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출처 : 구글 이미지

 

 

탱고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유럽과 미국을 거쳐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매혹적인 춤입니다. 볼룸댄스를 배우게 되면 왈츠로 시작해서 탱고로 끝나기 마련이지요. 그 만큼 중요하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탱고 하면 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오늘날 탱고 음악은 클래식 음악 무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늙은 장교 알 파치노는 낯모르는 젊은 여인과 탱고를 추는 장면은 두고 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이 때 흐르는 음악이 그 유명한 우나 카베자” 입니다.

 

 

 

 

출처 : 영화 여인의 향기 스틸컷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주인공인 프랭크(알 파치노)가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만난 여인(가브리엘)과 탱고를 추는 장면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정신,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탱고는 플라타 강(Rio de la Plata)에 속해 있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의 밀롱가, 할아버지는 쿠바의 하바네라.” 플라타는 대서양이 남아메리카 대륙의 아랫도리를 찢고 들어오는 형상을 한 거대한 강이다. 음악이자 춤인 탱고는 이 흙탕물투성이의 강에서 태어났다. 탱고가 플라타 강의 아이라는 말의 다른 의미는 오직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 녀석을 만들어낸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의 건너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는 또 다른 탱고의 거점이며, 완고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받아들이지 못한 실험적 탱고의 산실이기도 했다  

 

탱고의 탄생은 동시다발적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의 보카(La Boca)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옛 항구였던 이 지역은 유럽의 이민자들,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들이 향수에 젖어 시름하고 그것을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던 동네였다.

 

보카의 카미니토(Caminito) 거리는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탈리아계 항구 노동자들이 알루미늄 벽에 칠해놓은 파스텔 조의 건물들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다. 거친 환락가에서 태어난 탱고가 우아한 격식을 갖춘 예술로 변모했듯이, 카미니토도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탱고의 황금기에는 자유분방한 연주자들의 터전이 되었고, 군사 독재의 시기에는 어둡게 침잠했고,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거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찾는 번잡한 관광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길거리 연주자와 댄서, 오래된 밀롱가와 카페 등 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킬 보석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탱고의 거리 카미니토

출처 : 김현주 교수 블로그

 

 

 

Carlos Gardel. 이 달콤한 바리톤 가수는 루돌프 발렌티노와 더불어 세계의 여성들은 탱고의 마수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세계 투어를 통해 항구의 밑바닥 문화에 불과했던 탱고를 아르헨티나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보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카리브 해로 떠나던 도중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최전성기에 사라진 존재이니, 그로 인해 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말한다. "가르델은 지금도 날마다 점점 더 노래를 잘한다." 당연하게도 이 도시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바스토(Abasto) 시장에는 동상이 서 있고, 곳곳의 벽화에서 중절모를 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또한 흥미로운 장소는 글라스 궁(Palais de Glace). 원래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개장했다가 연주장 겸 댄스홀로 바뀐 곳인데, 가르델은 이 곳에서 일어난 난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부상을 입힌 장본인은 체 게바라의 아버지라고 한다 

 

 

 

 

전설적인 아르헨티나 탱고 가수 가르델

출처 : 구글 이미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오랫동안 '남반구의 파리'로 불려왔다. 영감을 찾아 북반구에서 날아온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만화가 휴고 플라트(Hugo Platt)도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유랑해온 이 청년은 1940년대 이 도시로 건너와 만화가로서 눈을 떴고, 유럽으로 돌아간 뒤 방랑의 영웅 [코르토 말테제(Corto Maltese)]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탱고]는 이 음악이 태어나던 시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특히 이 도시의 여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19236, 코르토는 아름다운 여인 루이제를 찾아 보카의 항구로 들어온다. 그는 사창가의 범죄 조직 바르사비아의 뒤를 캐더니 친구의 복수를 위해 부패한 경찰을 쏘아 죽이고 이 도시를 떠난다. 그 시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자라고는 거의 없는 극심한 남초(男超)의 도시였고, 탱고는 마초(macho)들의 춤이었다.

    

고된 일을 마친 부두의 하급 노동자들은 사창가로 향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춤을 연마해 겨루었다. 길거리의 여자들을 춤추는 척 껴안기 위해 거칠고 빠르지만 또한 유연한 동작을 익혔고, 이는 탱고 특유의 악센트를 만들어냈다.

 

 

 

열정과 낭만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를 추는 남녀

출처 : 트레블 웹진

 

 

나는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라났고 파리에서 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무대에 오를 때, 사람들은 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연주하리라는 걸." 우리가 '탱고'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름. 가장 유명한 작곡자이며 탁월한 반도네온 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는 만날 때마다 멱살잡이를 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바닷가의 도시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기에서 처음 '반도네온'을 손에 잡았고, 카를로스 가르델의 꼬마 통역 겸 반주자가 되어 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가르델이 카리브 해 순회에 그를 데려가려던 걸 아버지가 막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반도네온 연주자로 크게 주목받지만,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히 거부당했다.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팬클럽을 위한 카니발에 자신의 편곡을 선보였다가 "여기가 콜론 극장이냐"며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낙담한 그는 탱고를 떠나 클래식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나디아 블랑제의 가르침을 받다, 자신의 진짜 음악은 클럽에서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던 그 '탱고'임을 깨닫는다.

 

 

 

아스트로 피아졸라

출처 : 구글 이미지

 

 

이렇게 탄생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는 이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여전히 반발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이다. 탱고를 빼놓고." 그는 맞섰다. 내 음악이 탱고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식 식당 겸 갤러리가 있다(Piazolla Tango). 그가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던 콜론 극장에도 그 숨결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홈베이스였다 사라진 클럽 '676' 근처를 배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피아졸라는 부유하는 존재였고, 하나의 장소로 그를 기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날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스토르 피아졸라 국제공항이 있다.

 

 

 

Piazzolla Tango Center of Art and Spectacle

 

 

Piazzolla Tango Dinner Show

출처 :  piazzolla tango

 

 

'남반구의 파리'는 일 년에 몇 달씩 실제로 '북반구의 파리'를 대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 연주자들의 겨울 휴양지 역할을 해왔고, 덕분에 이 도시엔 고급스러운 공연 예술이 넘쳐흘렀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콜론 극장이다. 피아졸라는 일이 없는 낮 시간에 콜론 극장에서 연주되는 바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에 매료되었고, 이는 탱고 음악을 변모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어 변신한 탱고는 콜론 극장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다.

 

2007, 이 극장에 백발과 주름을 훈장처럼 단 연주자와 가수들이 모여들었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Café de los Maestros)]로 기록된 역사적인 공연을 위해서였다. [브로크백 마운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1940~50년대 황금기의 탱고를 재현하기 위해 그 시절의 스타들을 불러모았고, 호라시오 살간, 레오폴도 페데리코 등의 마에스트로들이 열정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세계 3대 극장으로 손꼽히는 남미 최고의 공연장인 콜론극장

출처 : 구글 이미지

 

 

페론과 에비타의 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그러나 1955년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탱고의 황금기는 처절하게 끝난다. 30년간 이어진 군사 독재는 3명 이상의 모임조차 금지시켰고, 페론의 민족주의가 육성시킨 탱고는 더욱 엄격히 탄압되었다. 1983년 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탱고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 싹은 이미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동네 산 텔모(San Telmo)에서였다. 이 동네는 그 어두운 시절에도 독특한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문을 연 현대 미술관(Buenos Aires Museum of Modern Art)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탱고 뮤지션들과 댄서들도 거점을 마련했다.

1969년 탱고 가수 에드문도 리베로는 식민지 시절의 식료품점을 개조한 뮤직홀 '엘 비에요 알마센(El Viejo Almacén)'을 열어 이 지역 탱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지금 산 텔모는 보카, 플로리다 스트리트와 더불어 길거리 탱고 댄서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1921311부에노스아이레스주() 마르델플라타에서 이발사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5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다 준 반도네온을 연주하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각종 라디오 연주회에 출연해 반도네온으로 고전음악을 연주하였고, 1933년에는 헝가리피아니스트 월다(Bela Wilda)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같은 해 우연히 탱고가수이자 작곡가인 가르델(Carlos Gardel)의 눈에 띄어 그가 만든 영화에 신문팔이 역으로 출연해 직접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1937년 전운이 감돌던 미국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뒤,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유명한 음악가들에게 두루 가르침을 받았다.

 

 

 

에드문도 리베로가 문을 연 '엘 비에요 알마센'은 탱고 르네상스의 산실이었다.

출처 : 아메리카 월드 투어

 

 

1955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과 연주에 힘쓰던 중 전통적인 탱고음악에 식상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1958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60년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중주단(Quinteto Nuevo Tango)을 결성하였다. 이 때부터 피아졸라는 자신의 탱고를 새로운 탱고, 즉 누에보 탱고로 부르며 기존의 탱고와는 다른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1974년 유럽으로 건너가 10년간 파리·암스테르담·빈은 물론, 뉴욕·도쿄 등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탱고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로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 역시 클래식 음악계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1992크로노스 4중주단이 발표한 피아졸라의 작품집 다섯 개의 탱고 센세이션 Five Tango Sensation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피아졸라를 '탱고의 황제'로 끌어올렸다.

 

탱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의 거장으로, 일명 '탱고의 전설'로 통한다. 1990파리에서뇌출혈로 쓰러진 뒤, 19927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죽었다.

 

 

[출처] 아스트로 피아졸라 [Astor Pantaleon Piazzolla ] | 네이버 백과사전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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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은자
    베르린필하모닉 브라스앙상블 씨디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훌륭한 연주도 보고 씨디까지 주셨으니
    두고 두고 들을께요.정말 고맙습니다.이건음악회 사랑합니다!!!
  2. artnouveau77
    남미의 열정이 보고싶어지는군요...칠레법인이라도 한번 가볼수있을런지...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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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의 음악회] 평생에 가장 감동적인 음악. 소중하고 가까운 누군가가 영영 눈을 감거나 세상을 떠나게 되면 조촐하지만 뜻 깊은 음악회를 열어보는 것이 어떨까요?[영안실의 음악회] 평생에 가장 감동적인 음악. 소중하고 가까운 누군가가 영영 눈을 감거나 세상을 떠나게 되면 조촐하지만 뜻 깊은 음악회를 열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Posted at 2012.06.26 12:05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8)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영안실의 음악회

 

 


바이올린계의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피호영

 

오늘은 좀 쑥스럽긴 하지만 제 자신이 직접 듣고 또 겪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몇 해 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가수 장사익씨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한 무대에 섰던 인연으로 서로 알고 지내던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씨가 소식을 듣고는 문상을 갔다고 합니다. 습관대로 악기를 들고 영안실에 들어서자 조문을 받던 상주가 갑자기 덥석 손을 잡고는 난처한 주문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평소 늘 바이올린 소리를 좋아하셨다면서 영전에서 한 곡조 켜달라고 졸랐던 것입니다. 혼자되신 어머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것이 늘 안타까웠던 차에 이런 부탁을 받고 보니 상주의 심정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악기를 꺼내 타이스의 명상곡을 연주했고 그 순간 상주뿐만 아니라 다른 문상객들, 그리고 무엇보다 연주자 스스로가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 70억짜리 스트리바리우스로 그는 거리의 악사가 되어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저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앞서 소개했던 사연이 머리 속에 또렷이 되살아났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님 영전에 음악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경우가 아닌 줄 알면서도 악기를 들고 문상을 온 음악인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고 예정에도 없는 음악회가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주일이 사이에 끼어 어쩔 수 없이 4일장을 치렀는데, 저녁마다 모두 세 차례의 짧은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문상객이 뜸해지는 밤늦은 시간, 힘든 시간을 도와주느라 늦게까지 분주했던 고마운 분들도 잠시 숨을 돌리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문상을 와서 잠시 소찬을 앞에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조문객들도 음악을 듣느라 대화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잔잔한 선율이 영안실을 빠져 나와 복도를 지나 다른 영안실에도 들렸나봅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사람들이 둘러 앉아 함께 음악을 들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여기 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더 없이 해맑은 미소가 가득 번졌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슬픔을 나누었고 그로 말미암아 너나없이 크나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 백주영(32·서울대 교수)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기억하며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생에 그렇게 감동적인 음악을 듣지 못했다는 말씀도 있고 그 때 들었던 음악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선뜻 어려운 청을 들어준 연주자들이 누군지 궁금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당시의 연주곡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타이스의 명상곡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른 곡은 몰라도 그 곡은 제가 특별히 부탁해서 연주한 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에서라도 연주자들의 이름만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씨와 임지연씨, 그리고 기타리스트 장승호씨가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들려주신 그 음악이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는지, 그래서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분명히 그 때 다짐을 했었습니다. 소중하고 가까운 누군가가 영영 눈을 감거나 혹은 그 누군가의 가족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영안실을 지켜야 하는 날만큼 조촐하지만 뜻 깊은 음악회를 만들어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주변뿐만 아니라 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이런 생각이 번져간다면 우리 모두 음악이 갖는 참 뜻을 깨닫게 되고 더불어 죽음이 있어 더욱 절실해지는 삶의 의미를 경건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격식을 따지는 듯싶지만 사실은 의식을 가볍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겉치레가 아니라 시간과 여유를 두고 뜻을 새기며 마음을 나누는 그런 예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숨 가쁘게 돌아가도 어느 순간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볼 줄도 알아야겠지요. 그렇게 때로는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스려야 숨이 턱에 차서 숨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음악이 다른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음악을 가까이 두고 평생을 함께 하십시오. 그보다는 음악 하는 누군가를 찾아서 벗으로 삼으십시오. 그래서 그 친구로 말미암아 여유를 찾고 위로를 얻고 평화를 누리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언제나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 소망과 함께 오늘은 타이스의 명상곡을 들으며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Meditation from Thais (타이스의 명상곡)

violin Kang jae-seon (강재선) 姜在善, piano An min-ho, warm-hearted sound,healing

 

Yuna KIM _Meditation from Thais , 김연아 타이스의 명상곡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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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의 역사/유래-[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의 역사/유래-

Posted at 2011.11.17 12:5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 아카펠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카펠라라고 하면 무반주 합창이나 중창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계실 겁니다.

관심이 있어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원래는 아 카펠라 a capella', 교회에 맞게’, 혹은 교회 풍으로라는 뜻인데 지금은 반주가 없이 부르는 중창이나 합창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처음에는 교회에 맞게라는 뜻이었다가 무반주 합창이나 중창으로 바뀐 까닭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먼 옛날에는 교회에서 노래를 불러 신을 찬양하려면 반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또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음악이 아니더라도 무반주로 부르는 합창이나 중창을 아카펠라로 부르게 되었고 오히려 교회에서는 반주를 사용하는 음악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카펠라 이렇게 만들어졌다!

왜? 초기 유럽의 크리스트교 교회에서는 왜 악기로 반주하는 것을 금지했을까요?

한 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을 무렵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때 원형경기장에 맹수들을 풀어놓고 온갖 악기 소리로 흥을 돋우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그 후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과정에서 이교도들의 종교의식과 기독교의 예배의식을 엄격하게 구분 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중세의 신학자들이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 있는 교리상의 명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등급의 음악이 있는데,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은 무지카 문두스 musica mundus', 즉 천상의 음악으로 신의 섭리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지카 휴마나 musica humana’, 즉 인간의 음악으로 신의 섭리가 인간 세상에 구현된 것이고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 musica instrumentalis’, 즉 도구의 음악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물리적 현상의 소리로 가장 낮은 등급의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고귀하고 오묘한 신의 섭리와 그것이 구현된 자연의 조화는 미천한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사람이 보고 듣고 느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교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일진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가치 있고 진실 된 본질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도 나타낼 수도 없다는 것이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일장춘몽 헛것에 불과하니 지상에 살면서도 천국과 하느님만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서야 믿었던 제자 토마스를 나무라셨듯이 보지 않고 듣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교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이었겠지요. 하물며 인간의 손으로 만든 악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음악 해석의 변천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다 변하기 마련이고 종교의 교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음악에 대한 해석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천상의 음악은 신의 섭리와 그것이 구현된 자연의 조화까지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 되고 인간의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신의 섭리요 자연의 조화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구의 음악은 인간이 만든 도구, 즉 악기로 내는 소리인 만큼 여전히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변화를 거쳐 사람의 목소리로 신을 찬양하는 것에는 당위성이 부여되었지만 그 후로도 한참동안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은 교회에 수용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악기로 반주하는 성가나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지만 특정 교파 경우는 아직까지도 교회 안에서 노래로 찬양을 하거나 찬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아카펠라의 황금기!

반주 없이 노래하는 합창이나 중창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는데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마드리갈이라는 양식이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 무렵부터 악보 출판이 시작되어 그것이 또한 이런 음악을 널리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에 출판된 음악들의 상당수가 기록으로 남게 되어 지금도 합창단의 레퍼토리만큼은 바로크 시대를 앞질러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무반주 합창곡이 교회 밖에서 성행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업적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을 꼽으라면 팔레스트리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듯이 가톨릭교회가 안팎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홀로 소신을 꺾지 않고 위대한 걸작으로 교회음악의 권위를 지켰던 거장이었습니다. 요즈음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사회에도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팔레스트리나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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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은 삼백년마다 새로 태어난다?[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음악은 삼백년마다 새로 태어난다?

Posted at 2011.11.03 18:18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 음악이 300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 인간의 역사가 늘 되풀이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문명도 그러려니와 나라도 그렇고, 한 인간의 삶도 부침을 거듭하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드물지만 그 가운데 어떤 일들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거듭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서양 음악의 역사가 그렇다고들 합니다. 음악의 기원을 따지자면 까마득한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기록으로 남은 음악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보편적인 역사라는 것이 문자 기록이 있고난 다음부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역사를 제대로 언급하자면 음악의 기록, 즉 악보가 남아서 그것을 지금에 와서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서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악보로 남아서 오늘날에도 재현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그의 재위 14, 즉 서기 590년부터 604년 사이 동안 유럽 각지의 성가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작업의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교황이 시작했지만 그의 사후에 한참이나 지나서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라고 하는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이름을 따서 붙인 성가 형태이다. 물론 교황께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모두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고, 그분께서 당시의 성가들을 정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을 백년쯤 뒤로 생각한다면 700년경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약 삼백년쯤이 지나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에다 다른 선율을 붙여서 동시에 부르는 일이 생기게 되었고 또 삼백년쯤이 지난 천 삼백년 경부터는 교회 밖에서 부르던 노래나 악기로 연주하던 춤곡들까지도 기록으로 남겼는가 하면 리듬이라는 것이 음악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삼백년이 지난 1600년경 우리가 흔히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지금의 우리가 들어도 생소하기까지 한 현대음악이 탄생한 것이지요.
라틴어로 기록된 오래된 문헌을 보면 1300년경에 시작된 획기적인 새로운 음악을 아르스 노바신 예술이라 일컬었고 이전 300년 동안의 음악을 이와 구분하여 아르스 안티쿠아’, 구 예술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바로크라 부르게 된 1600년경의 음악도 라틴어로 누오베 무지케’, 신 음악이라 했고 20세기의 현대음악은 영어로 뉴 뮤직이라 부르고 있으니 결국은 1300년경부터 300년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음악들의 이름이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아르스 노바는 新 예술이었으며, 바로크는 新 음악이고, 현대음악은 New Music 이다.


| 묘한 것은 1300년대 이후 백오십년마다 또 다른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인데, 1450년경에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고 1600년과 1900년 사이의 1750년경에는 고전주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시기가 바로 1750년대 이후의 백오십년입니다. 그 백오십년 사이에 고전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지금 우리가 즐겨 듣는 클래식 음악의 명곡들 대부분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클래식의 어원은 고대 로마시대의 계급을 가르키는 라틴어로 잘 정돈된, 품위있는, 영구적이며 모범적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후 예술사에서 고전주의 시대를 일컫는 말로 클래식이 사용되다가 지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 음악이라 하는 영역까지 아우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이라면 당장 그 말이 가지는 의미에서부터 찾을 수 있겠지만 고전주의 시대 이후의 음악이 클래식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전까지 나라마다, 혹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던 서양의 음악이 고전주의 시대 이후 점점 하나의 질서로 통일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통합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이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입니다. 그래서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1750
년은 다름 아닌 바흐가 세상을 떠난 해입니다. 한 시대의 종말과 한 시대의 시작을 한 작곡가가 생애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의 역사는 늘 위대한 작곡가의 전기로 채워져 있는 모양입니다. 어찌 보면 바흐는 바로크 시대에도 속하지 않고 고전주의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작곡가입니다. 속한다기 보다는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토벤의 위대한 업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고전주의 시대를 완성하여 낭만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대게는 그를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라 하지만 좀 안다는 사람들은 낭만주의 시대의 선구자로 그를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나 그도 바흐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시대가 아니라 두 시대를 다 포용했습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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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교수님 어제 계명아트센터에서 함께 있었던 최인규입니다.

    명쾌하고 즐거운 설명 갑사합니다.

    내년에 북구에서 뵙기를 희망하고 이건콘서트에서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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