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신의 목소리를 가진 테너 파바로티를 기리며...[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신의 목소리를 가진 테너 파바로티를 기리며...

Posted at 2012.06.15 11:59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25)
파바로티를 기리며

 

 


이탈리아 사람들은 하느님이 남자를 만든 다음 여자를 만들었고, 그리고 테너를 만들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테너는 특별해서 어딘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아닌게 아니라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들마다 수준급의 테너를 구하지 못해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높은 음역만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테너라면 아무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말까지도 합니다. 이렇듯 공급이 수요를 전혀 따르지 못하는 상황이니 테너들이 저마다 목에 힘주고 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습니다. 마치 발레에 있어 발레리노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겠지요.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 세계적인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7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늘 뭇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고 보니 유명한 테너가수치고 스캔들이 없었던 경우도 참 드문 것 같습니다. 한 때 황금의 목소리를 가진 테너로 각광받았던 델 모나코라는 테너도 늘 염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신문기사에 실려 곤혹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말하기를 당신들이 테너에 대해서 무얼 아느냐, 당사자인 내가 가만있는데 왜들 난리들이냐며 제발 남편을 그냥 두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힘과 긴장감으로 꽉 찬 목소리를 보여 주던 마리오 델 모나코.

 

테너들에게 있어 고음에 대한 부담은 한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이자 악몽입니다. 더러는 잘 나가는 테너가 어느 날 갑자기 고음이 나지 않아 무대를 떠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무대 위에서 이런 비극을 맞아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도 없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화려하고 열광적인 무대 뒤의 이런 암울한 상황이야말로 테너를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제 3의 인간으로 만드는 원인이겠지요. 테너들뿐만 아니라 성악가들의 목소리는 신체의 일부인 만큼 늘 몸과 마음의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릴 때는 주요 배역들의 대역을 미리 뽑아서 대기시키는 경우가 많고 유명한 가수들 중에는 대역으로 있으면서 기회를 얻어 성공한 경우가 많습니다. 파바로티가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 데뷔한 것도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발탁된 덕분이었습니다.

 

 

 

테너가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의 소리를 흔히 하이 C'라고 합니다. 피아노 건반에서 가운데 옥타브보다 하나 더 올라간 옥타브의 끝에 있는 도를 치면 나는 소리가 바로 그 음높이입니다. 그 음을 너무 쉽게 잘 낸다고 해서 '하이 C'의 제왕으로 불렸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20세기 오페라 무대를 카루소가 열었다면 그 마지막을 장식한 테너는 당연히 파바로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스포츠카의 대명사 페라리의 산지로 유명한 모데나에서 태어나 한 때 축구선수를 꿈꾸었던 파바로티는 뒤늦게 성악가의 꿈을 키워 오페라계의 판도를 바꾸고 결국 역사 속의 큰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계 3대 테너로 함께 군림했던 도밍고는 늘 파바로티에게 최고의 대우를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신이 내려주신 그의 목소리를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도밍고의 목소리가 더 극적일지는 몰라도 그와 비슷한 목소리는 더러 다른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고 그 점에서는 카레라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파바로티의 목소리와 착각할 만큼 비슷한 목소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파바로티의 장점으로 고음을 쉽게 낸다는 것을 가장 먼저 내세우지만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그의 무기라면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의 음색일 것입니다.

 

 

 

 

파바로티는 그 유명세만큼 거기에 걸맞는 일화도 많습니다. 1988년 독일의 오페라 극장에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에 출연했을 때는 1시간 7분 동안 무려 165번의 커튼콜을 받아 이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고 1990년 로마올림픽의 전야제에서 처음 시작한 쓰리 테너공연은 그 후 음반으로 발매되어 수백만 장이 팔렸고 당연히 클래식 분야의 최고 음반판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쓰리 테너이후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공연과 음반이 또 한 차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오페라를 떠나 지나치게 상업성과 대중성을 추구한다는 비난도 뒤따랐습니다.

 

 

 

 

그가 출연한 오페라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대표작이라면 첫 출세작인 라보엠의 로돌포역, 그리고 기네스북에까지 오르면서 파바로티를 일약 세계 최고로 만든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역을 아마도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같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이 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 도니제티의 연대의 딸도 빼놓을 수가 없겠지요. “하이 C"를 피해 고친 악보 대신 원래의 악보대로 불러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작품이지요. 로돌포의 상대역 미미로 출연했던 명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는 한살 차이의 동향 친구로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로 서로 호흡을 맞추었던 존 서덜랜드도 파바로티의 성공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도쿄 공연에서 한 음대생이 무대에 뛰어올라 파바로티를 포옹하는 사건을 만들었던 리골레토의 만토바 역도 그의 장기임에 틀림이 없지만 오늘은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베르디의 레퀴엠가운데 한 곡을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레퀴엠은 죽은 자를 추모하는 미사인 만큼 더욱 의미가 있을 듯싶습니다. 산자의 기쁨과 죽은 이의 절망 대신 산자의 고통과 죽은 이의 평화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베르디 - 레퀴엠 中 <진노의 날> - 클라우디오 아바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르디: 레퀴엠(진혼곡)
VERDI: Messa da Requiem


2. 진노의 날
2. Dies Irae


Angela Gheorghiu
Daniela Barcellona
Roberto Alagna
Julian Konstantinov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conducto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Berliner Philharmoniker

Swedish Radio Chorus
Eric Ericson Chamber Choir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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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오 솔레 미오’는 민요가 아니다.[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오 솔레 미오’는 민요가 아니다.

Posted at 2012.05.11 15:10 | Posted in 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17)
‘오 솔레 미오’는 민요가 아니다.

 

 

"오 솔레미 오"로 유명한 쏘렌토

이탈리아 민요 오 나의 태양이라면 아마도 모르는 이보다는 아는 이가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오랜 세월 해마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거니와 성악가가 출연하는 크고 작은 무대에서 이 노래만큼 많이 불리고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노래도 없을 것입니다. 들어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선율을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이들도 많고 심지어는 이탈리아어로 된 원래의 제목 오 솔레 미오를 친숙하게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요. 전부터 노래는 세계인들의 애창곡이었지만 20세기 최고의 문화상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쓰리 테너공연의 대미를 장식함으로써 마치 지구상의 모든 노래를 대표하는 듯한 위용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이 노래를 이탈리아 민요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전을 보면 민요란 예로부터 민중 사이에 불려오던 전통적인 노래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대게 특정한 작사자나 작곡자가 없이 민중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며 민중들의 사상, 생활, 감정을 담고 있다고 정의되어 있지요. 그런데 오 나의 태양은 에두아르도 디 카푸아가 지오반니 카푸로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이처럼 작곡가와 작사자가 분명하니 민요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가사를 보면 마치 지중해의 맑은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노래하고 있는 듯 느껴지지만 사실은 흑해에 면한 우크라이나의 도시 오데사에서 만들어진 곡입니다. 떠돌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를 따라 그곳까지 간 디 카푸아가 18984월의 어느날 호텔방 창문으로 스며든 햇볕을 받으며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민요라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기 마련이지만 이 노래는 악보로 인쇄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리의 타볼라 로톤다 가요제에서는 2등에 그쳤지만 출판업자 비데리가 이 곡의 진가를 알아보고 악보로 내놓았던 것입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오 솔레 미오

 

 

 

비데리의 남다른 안목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노래는 이것 말고도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곡이라면 돌아오라 소렌토로일 것입니다. 이 노래 역시 이탈리아 민요로 알려져 있지만 오 나의 태양과 같은 무렵에 데 쿠르티스 형제가 작사, 작곡한 나폴리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처럼 소렌토를 멀리 떠나는 연인을 이별하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만들어진 곡이 아니라 소렌토를 방문한 이탈리아 총리를 환송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곡된 노래입니다. 1902915일 오랜 가뭄으로 재난을 맞은 바질리카타 지방을 순시하던 이탈리아 총리 자나르델리는 소렌토에 이르러 임페리얼 호텔에 묵게 됩니다. 이 호텔의 사장이자 소렌토의 시장이었던 트라몬타노는 총리에게 이 지역의 숙원사업인 우체국 건립을 간청하였고 여러 차례의 거절 끝에 겨우 승낙을 얻어내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혹시 총리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급히 데 쿠르티스 형제를 불러 총리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노래를 만들도록 부탁했습니다. 형제는 바다가 보이는 호텔 발코니에 앉아 단숨에 노래를 만들었고 나폴리에서 소프라노 가수를 불러 총리가 호텔을 떠나는 순간 이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이 노래를 만든 데 쿠르티스 형제의 후손들에 따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형인 잠바티스타 데 쿠르티스가 벌써 오래 전 트라몬타노에게 헌정하기 위해 동생인 에르네스토 데 쿠르티스와 함께 노래를 만들어 두었는데 마침 부탁이 있자 먼저 만들었던 곡을 고쳐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나폴리에서 피에디그로타 가요제를 준비하고 있던 출판업자 비데리가 이 노래를 듣고 감탄하여 잠바티스타 데 쿠르티스에게 가사를 나폴리 방언으로 고쳐 가요제에 내놓도록 했고 이를 들은 청중들은 모두 넋을 잃을 정도로 열광했다고 하지요. 나폴리 사람들은 소렌토를 수리엔토라 했고, 그래서 노래의 후렴을 딴 제목도 토르나 아 수리엔토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이탈리아 민요라고 잘못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은 이 무렵 나폴리에서 성행했던 여러 가요제에 입상하여 그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입니다. 오 나의 태양을 작곡한 디 카푸아는 마리아 마리를 작곡했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작곡한 데 쿠르티스는 물망초너는 왜 울지 않고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산타루치아역시 19세 중반에 만들어진 나폴리의 노래, 즉 칸초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꼭 이 무렵 나폴리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알려지게 된 것일까요? 물론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노래보다 유독 더 아름답기도 하고 비데리와 같이 남다른 안목을 가진 출판업자가 있어 악보로 널리 알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전설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습니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활동하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으로 건너간 그는 화려한 오페라 무대가 막을 내리고 나면 동포들이 즐겨찾는 소박하고 정겨운 이탈리아 식당을 찾아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나폴리의 칸초네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동포들을 위로하고 또 스스로 향수를 달래기도 했겠지요. 그렇게 불렀던 그의 애창곡들은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녹음기술 덕에 음반으로 만들어져 미국 전역으로, 또 세계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신화와도 같은 카루소의 명성과 더불어 말이지요.

 

 

소렌토는 나폴리만을 사이에두고 나폴리와 마주보고 있다. 철도로 약 한시간 거리.

 

이렇듯 오 나의 태양은 불멸의 가수 카루소와 함께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지만 정작 노래를 만든 디 카푸아는 1927년 빈민들을 위한 구호병원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후로도 칸초네는 나폴리에서, 또 이탈리아 전역의 수많은 가요제를 통해 만들어지고 널리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어느덧 과거의 영광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산레모 가요제를 기억하십니까? 아니면 질리오라 칭케티의 나이도 어린데라는 노래는 잊지 않으셨습니까? 통기타 가수들에게 열광하던 그 시절, 산레모 가요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많은 노래들을 우리말로 옮겨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추억만이 아련할 뿐이고 칸초네라는 이름도 서먹할 따름입니다. 프랑스의 노래 샹송도 마찬가지겠지요. 카루소가 없었다면 오 나의 태양도 그렇게 힘없이 스러졌을 것이고 한 때지만 나폴리에서 만들어지고 사랑받았던 그 수많은 노래들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야겠지요. 그런데 노래를 찾아야할까요? 카루소를 찾아야할까요?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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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cylake
    감사합니다. 오늘 이 사이트를 발견하고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오페라 팬이기도 하구요. 산레모 가요제가 유행했던 시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 잘 모르지만.^^ 전 오히려 지금 이탈리안 올디 송에 빠져들고 있어요. 세상이 좋아져서 라이에서 보내주는 산레모 가요제 본선 방송이 유튜브에 다 있기도 하구요. 2012년 산레모 가요제도 유튜브로 다 봤습니다. ^^ 한편으론 올디 송에 비해 미국화, 국제화가 많이 된 느낌이지만. 또 한편으론 이탈리아 특유의 멜모리 중심, 기승전결이 완벽한 가창 방식. 높은 가창력을 가진 허스키 디바 숭배 등은 여전히 이탈리아는 이탈리아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더군요. ^^ 앞으로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 2012.06.18 23:21 신고 [Edit/Del]
      클래식에 조애가 깊은 아이스레이크님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방문부탁드립니다.
      저희 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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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유럽여행_피렌체 어디까지 가봤니?^^[유럽여행]유럽여행_피렌체 어디까지 가봤니?^^

Posted at 2012.04.05 13:18 | Posted in 직장인 톡톡/심심타파!

영어로는 플로렌스, 로마에서 약 230KM떨어진 지역.

BC2세기부터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후 로마와 프랑크 왕국의 지배에 있었으나,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 독립하고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면서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고 
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 교황당과 황제당의 싸움에서 인근도시를 지배하며 공화국으로 성장,
10만 인구에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여,
권력을 잡은 메디치가의 적극적인 문예지원으로
황금기를 맞이하는 지역이입니다.

 
<t산타크로체 성당_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등의 무덤이 있어요, 단테의 기념비와 함께>

<다비드상_도나텔로>

우피치 미술관
원래는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 1세가 자신의 집무실로 쓰기 위해 건축하여
전 3층에 미술품 전시를 위한 공간 계획,
가스토네를 끝으로 메디치 가문이 단절되고 1737년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피렌체를 점령, 메디치의 마지막 손녀인 안나 마리아 데디치는 죽을때까지
피티궁에 거처, 마지막 유언으로 모든 메디치가의 재산을 기부하면서
피렌체 밖으로의 반출금지를 요청하여 현재전시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봄'이 있다.

 


메디치가
평범한 중산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부를 측적,
140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조반니 디 비치는 당시 일어났던 방직 노동자 길드 반란에서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정계를 진출, 피렌체 공화국 수반인 곤팔로니에레에 임명,
아들 코지모 데미치는 피렌체 인근 메디치 별장에
고전주의자 피지노를 학장으로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를 창설하여 문예에 힘썻다. 
메디치가는 로렌초 데 메디치까지 르네상스 전성기를 주도하였습니다.
1537년 메디치 가문을 이어간 사람은 정통 장자 후손이 끊어지면서
먼 친척인 조반니의 후손인 코시모 1세로 그는
교황으로부터 대공을 인정받음으로써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교황 레오10세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던 3대 교황중 한명으로 
그 씀씀이가 엄청났던 교황이기도 하죠^^ 

메디치가는 미켈로초,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피렌체를 최고의 르네상스 중심지로 만들었죠.
메디치 가문은 산로레초 교회, 산 마르코 수도원 등
피렌체 및 다른도시 성당건축과 장식사업을 후원하였습니다. 

이 정도의 피렌체의 지식이면 피렌체를 방문하여
여행하는 것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 도시의 역사를 알고 그 곳을 둘러봄은
많은 것을 다르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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