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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오디오가 만들어낸 크라이슬러의 소품들 / 한장의 CD에 들어간 음악의 길이는 누가 정한 것일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27.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6)
오디오가 만들어낸 크라이슬러의 소품들

 

 

작곡가 브람스는 베토벤을 무척 존경했다고 합니다. 베토벤 이후 작곡가들은 대부분 베토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브람스에게 있어 베토벤은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물론 베토벤이 남긴 모든 작품들을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도 교향곡 9번 합창을 가장 좋아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토록 좋아했던 이 교향곡을 브람스는 평생 딱 두 번 들을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 번은 그가 살았던 비인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서 이 작품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차를 타고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궂은 날씨에 고생한 탓에 몸져눕기 까지 했다는군요. 음악의 본고장이라는 비인에서 활동했던 가장 성공한 음악가가 평생 동안 이 명곡을 단 두 번만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 '환희의 송가'



그러고 보면 클래식 음악이 지금처럼 홀대를 받게 된 것도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음반을 사러 나갈 필요도 없이 집에서 인터넷으로 원하는 음악을 찾아서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덧 전자제품을 취급하는 전문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 보면 오디오 전문상점들이 하나 둘씩 줄어서 얼마지 않아 자취도 사라질까 걱정입니다. 오래 전 전축이 귀하고 음반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 음악 감상실이라는 곳이 있어 하루 종일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해서 들어야 했던 때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는 아마도 악보의 발명 이후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일 것입니다. 소리를 어디엔가 가두어 두었다가 듣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다시 꺼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이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금속으로 만든 원통형의 디스크에 소리를 저장하다가 이후 PVC로 된 원반형으로 바뀌면서 음질도 좋아지고 보관도 편리해졌지만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길이가 고작 5분을 넘지 못한다는 한계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짧은 소품이나 노래말고는 음반에 담기가 힘들었는데요, 당연히 유명한 오페라 가수들이 여러모로 유리했겠지요. 전설적인 테너 카루소나 베이스 샬리아핀이 지금도 당대에 누렸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녹음기술과 음반 산업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반 산업이 만든 또 한 사람의 스타라면 크라이슬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시대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으로 그의 연주가 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작곡한 주옥같은 바이올린 소품들이 음반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로즈마린이나 사랑의 슬픔’, ‘사랑의 기쁨과 같은 그의 대표곡들은 지금도 바이올린 소품의 대명사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5분을 넘지 않는 길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이쯤 되면 짐작하셨겠지만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소품들은 음반사로부터 의뢰를 받고 작곡되었기 때문에 각각이 음반 한 장에 수록될 수 있는 길이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술의 한계가 오히려 명작을 탄생시킨 계기가 된 셈인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예술은 그 시대의 상황과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입니다.





기술의 발달은 LP 시대를 열어 5분의 한계를 한 시간으로 늘렸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CD가 발명되면서 완벽한 소리의 재현과 영구적인 보존, 그리고 저장시간의 무한정 확장이라는 세 가지 숙제를 다 해결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과는 반대로 행복한 고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장의 음반에 무한정의 음원을 수록한다면 결국은 남는 것이 없는 장사를 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오겠지요. 그러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분량을 한 장의 음반에 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분야의 대표적인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은 대지휘자 카라얀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카라얀은 대뜸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한 장에 다 담을 수 있는 분량이면 좋겠다는 대답을 했다는군요. 이미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수도 없이 녹음했던 그로서는 늘 다른 교향곡보다 길이가 긴 마지막 9번을 한 장의 음반에 다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물론 카라얀에게만 자문을 구해서 결정하지는 않았겠지만 이후 CD 한 장에 수록되는 음악의 전체 분량은 대체로 70분에서 몇 분을 더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라얀이 말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연주시간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언제는 음반의 한계가 음악의 길이를 결정하더니 어느덧 시절이 변해서 음악의 길이가 음반의 한계를 결정하게 될 줄은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브람스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을 좀 더 지났지만 변해도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랬다지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 뿐이라고 말입니다.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