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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음악회 Talk Talk/홍승찬교수의 클래식 톡톡

[홍승찬 교수의 재미있는 클래식음악 이야기] 콘서트홀이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22.

 

 



홍승찬 교수의 클래식 음악(5)
콘서트홀이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 오케스트라! 그 이름의 유래는 어디서 시작될까?

우리가 이름을 들어 알만한 오케스트라들은 그 오케스트라가 터를 잡고 있는 지명 다음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아니면 심포닉 오케스트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보스톤 심포닉 오케스트라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오페라 극장에 전속된 오케스트라와 방송국 소속의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주 드물게 전혀 색다른 이름을 가진 오케스트라들도 없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예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아닌가 싶은데요, 게반트하우스라는 공연장에 터를 잡고 있어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 오케스트라 같지 않은 오케스트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역사


그런데 게반트하우스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면 공연장이나 오케스트라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 말의 뜻을 풀어서 옮기자면 직물업자들의 회관이니 오늘날로 치자면 섬유회관, 직물센타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건물인 셈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공연장의 이름을 그렇게 붙였고, 거기에 상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이름까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의문을 풀기 우해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슈만 - 교향곡 4번 1악장(Part 1) - 리카르도 샤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743, 라이프치히에서 직물을 거래하던 상인 12명이 12명의 음악가를 초청해서 달마다 각각의 집을 차례로 돌면서 음악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악회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음악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음악회 장소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카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점점 많아지게 되자 카페보다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궁리 끝에 라이프치히 직물업자들의 회관, 즉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점점 넓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더 많은 연주자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더 많은 재정적 부담을 나누기 위해 더 많은 상인들, 혹은 회원들의 참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연주를 하고 좀 더 편한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게반트하우스 내부도 고쳐야 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1784년 콘서트홀을 지어서 보금자리를 옮겼지만 한 때 머물렀던 게반트하우스가 지금까지도 오케스트라의 이름 속에 자랑으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3. 왜 썰렁한 회관에서 공연을 할까?

아마도 이런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라이프치히라면 독일에서 꽤나 큰 도시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쓸만한 공연장이나 콘서트홀이 있을 터인데, 하필 어수선한 카페를 생각하고 썰렁한 회관을 찾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답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물론 전문 연주회장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라이프치히 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 연주회장, 혹은 콘서트홀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연주회를 해서 재정을 꾸려가는 오케스트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표를 사서 음악회를 간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살면서 익숙한 많은 일들이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있어왔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법이지요.



당시는 오케스트라에 지휘자가 따로 없고 악장이 악단을 이끄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만 세기가 바뀌면서 상황도 달라졌고 1835, 드디어 최초의 상임지휘자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부임한 상임지휘자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존이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를 악장으로 영입하고 그때가지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초연하는 등,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밖에도 작곡가 슈만이 발견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과 멘델스존 자신의 교향곡 3스코틀랜드도 이 교향악단을 통해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멘델스존이 부임하기 전 이미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을 초연한 바 있었던 이 교향악단은 멘델스존 이후에도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등을 초연하여 그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베토벤 - 로망스 1번 G장조 - 르노 카퓌송, 쿠르트 마주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2명의 상인이 뜻을 모아 12명의 음악가로 시작된 이 소박한 음악회가 시민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 콘서트홀을 만들고 오케스트라로 커지면서 음악의 역사 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연이야말로 라이프치히의 자랑이자 긍지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 도시의 문화적 역량을 가늠하려면 그 도시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보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요.

 

 

 


글 : 홍승찬 교수
편집 : 신이다